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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드립 - FPS 조작 방법의 진화 ( https://www.dogdrip.net/318550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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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4. 1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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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좋아해? 나는 맥주를 정말 좋아해서 자주 먹는 편인데

일게이들과 전반적인 맥주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려고 해

글이 좀 길 수도 있는데 재미있게 쓰려고 많이 노력했으니까 잘 봐주기 바래

눈을 홀리는 황금빛깔, 순백색의 거품, 머리 끝 까지 전해지는 청량감!!


세계인의 사랑을 두루 받고 있는 맥주에 대해 araboza!!



목차

1. 고대의 맥주

2. 맥주의 양조 공법
   가. 상면발효
   나. 하면발효

3. 맥주에 얽힌 일화와 축제

4. 토막상식(홉과 그 종류)

5. 마무리


1. 고대의 맥주

인류 역사에서 맥주가 등장한 것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다고 여겨지는 2가지 설에 대해 설명해주려고 해

‘기원전 4,000년 경 수메르인이 먹던 주식인 곡물죽에 의해 등장했다’는 설
‘기원전 1,500년 경 이집트인이 만들어먹던 빵에 의해 등장했다’는 설이야

먼저 ‘기원전 4,000년 경 수메르 인이 먹던 주식인 곡물죽에 의해 등장했다.’는 설부터 알아보자.




수메르인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룩한 민족이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매년마다 범람이 일어났는데 수메르인들은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관개시설을 확충하고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

강이 범람하여 비옥해진 땅에서 재배된 작물은 보리였고 수메르인들은 보리를 빻은 후 물에 부은 음식인 곡물죽을 주식으로 했다고 해.

그러나 남는 보리를 저장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수메르인들은 보리를 햇볕에 말려 보관하기 시작했는데 말린 보리는 싹이 트기 시작했고 이것이 ‘맥아’야


[맥아, 맥주의 주 재료]

수메르인들은 이 맥아를 이용해서 곡물죽을 만들었는데 이 곡물죽이 보리를 이용해서 만든 곡물죽보다 더 달콤하며 소화가 잘 되었던 거지

우연히 몇일 방치되었던 곡물죽을 먹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겠어?

맥아는 각종 효소가 활성화되어 있어 포도당과 맥아당 등이 형성되어 있어, 이런 맥아를 빻아 물을 이용해 만든 곡물죽은 현재 양조에 쓰는 맥아즙과 비슷한 성질을 띄는데 이 맥아즙이 야생 효모와 곰팡이를 만나서 발효된 것이 초기의 맥주라고 해

수메르 인들은 이 초기의 맥주를 발전시켜 보리와 밀을 이용한 술인 ‘시카루(Sikaru)’를 빚게 되


[기원전 3,000년 경 술의 여신인 닌-카시에게 바칠 맥주(시카루)를 빚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술을 빚는 수메르인들은 노동의 대가로 시카루를 신분에 따라 차등 지급 받았다고 하고 함무라비 법전에도 맥주에 대한 조항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음용된 술이란 것을 알 수 있어

이어서 ‘기원전 1,500년 경 이집트인이 만들어먹던 빵에 의해 등장했다’는 설에 대해 알아보자.

이집트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아시킨 보리나 밀을 빻은 가루를 반죽한 후 얼마간 숙성시켰다가 구워서 부드러운 빵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어.


[이집트의 전통빵, 아이시]

빵을 숙성시키면 야생효모를 통해 발효되는데 이 과정에서 알코올과 탄산가스가 발생하고 이 탄산가스가 빵을 부드럽게 만들지.

이 빵을 물에 불리고 몇 일 동안 발효시킨 뒤 체로 걸러내면 특별한 색과 맛을 가진 액체 시카루가 만들어졌어.

이러한 이집트의 양조방법이 수메르인의 양조방법과 유사하며, 더 늦은 시기에 등장한 것으로 봐서 소아시아인의 이동으로 수메르인의 양조방법이 이집트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카루를 액체 빵이라는 뜻의 ‘헤크’라고 칭했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헤크를 빚고 있다. 이 과정은 벽화에 자세히 남아 후대로 전해졌다.]


[고대인들이 시카루(헤크)를 마시고 있다.]

이 고대 맥주들의 공통점은 걸쭉한 죽 같은 질감이었다는 거야. 수메르 인과 고대 이집트인들은 긴 항아리에 담아 빨대로 빨아마셨다고 해

시간이 흘러 이집트가 정복 전쟁을 하게 되면서 헤크 제작 기술이 유럽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해. 시카루, 헤크의 죽 같은 맥주의 형태에서 발전하고 변화하여 현재의 맥주가 된 거야

시간은 흘러흘러 기원전 500년.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맥주는 와인에 비해 후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어. 맥주는 와인에 비해 저급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그는 ‘이집트인이 맥주를 마시는 것은 포도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스의 작가 아이스킬로스. 그는 이집트 사람을 두고 ‘보리로 만든 술이나 마시는 족속’ 이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그리스 시민들은 맥주를 지토스(Zythos)라 부르며 식사 대용으로 먹기도 했어. 로마인들은 정복 활동을 하면서 변방에 나가 있던 지휘관, 성직자, 병사들이 와인을 구할 수 없어 주로 맥주를 마셨다고 해.

현대 유럽인들의 조상인 게르만인들도 맥주를 즐겨 마셨는데 게르만인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로마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로 추정되고 있어. 고대문명의 맥주 빚는 기술이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 -> 그리스/로마 -> 게르만족 순으로 전파된 거야.


[게르만인]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시카루, 이집트의 헤크, 그리스의 지토스가 야생 효모를 활용한 걸쭉한 죽 형태의 맥주였다면 게르만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맥주를 빚었는데 바로 발아된 곡물을 솥에 넣고 약한 불에 오래 끓인 뒤 맥주통에 담아 발효했다는 거야.


[로마의 역사학자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그는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보리나 곡물을 끓여서 와인처럼 괴어오르도록 한 품위가 떨어지는 술’ 이라며 게르만족들의 맥주를 언급했다.]

곡물을 끓이게 되면 야생 효모가 사멸해서 자연 발효가 어려운데 게르만인들은 벌꿀을 첨가해서 꿀 속에 있는 효모를 활용해 맥주를 발효했지.

그래. 현대적인 맥주 양조의 기초가 확립된거야!!


[서로마 황제 샤를 마뉴]

8~9세기 무렵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수여받은 샤를 마뉴를 비롯한 프랑크 제국의 황제들은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 제국 각지에 기독교 수도원을 건설하기 시작해

이렇게 설립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맥주를 양조하게 되었는데 수도원에서 양조된 맥주들은 수도사와 민중에 의해 많이 소비되었어


[수도사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들은 금식 기간에도 하루 1잔의 맥주를 마시며 2주가량을 버텼다.]

수도원의 맥주는 적은 양의 곡물로도 충분한 양이 생산되었고 민중에게는 액체 빵이라고 불리며 식사 대용으로, 또는 하수시설의 부재로 오염된 식수를 대신하여 물 대신 마시는 음료로 각광받았어.

시간이 거듭될수록 수도사들은 양조기술을 발전시키며 점차 맥주는 현재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진화해왔어.


2. 맥주의 양조공법

맥주의 양조 공법은 게이들도 잘 알겠지만 크게 ‘상면발효’, ‘하면 발효’, ‘자연발효’ 3가지로 나뉘어. 한번 알아보자.


   가. 상면발효


15~25도의 상온에서 발효시켜 맥주 효모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야. 에일(Ale)이 가장 잘 알려져 있고 흑맥주로 유명한 스타우트, 그리고 밀 맥주인 바이스비어가 상면 발효 맥주로 분류된다.


  1) 에일(Ale)

대부분의 에일 맥주의 종주국은 영국이야. 오랜 세월에 걸쳐 개량되고 분화하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에일 맥주가 있어.

에일맥주는 라거 맥주에 비해 월등한 풍미를 가지고 있지. 라거 맥주가 상대적으로 비슷비슷한 보리와 홉의 맛과 향이 있는데 반해 에일 맥주는 상면발효법의 특성상 맥주 위에 떠 있는 효모가 짧은 시간에 고온에서 발효를 진행하면서 여러가지 원료의 맛과 향을 풍부하게 살려낸다는 특징이 있어. 에일 맥주는 10~13도 정도에서 가장 풍미가 좋다고 해.


  2) 페일 에일(PA, Pale Ale)


‘Pale’은 창백하다 라는 뜻인데 빛깔이 옅거나 밝다는 느낌으로도 사용하는 단어야. 페일 에일은 한 마디로 옅은 색을 띄는 에일이라는 뜻이지.

영국의 페일 몰트라는 품종의 보리를 이용한 맥주로 향이 매우 좋기 때문에 너무 차갑게 마시지 않는 것을 추천해. 영국 현지에서는 비터(Bitter)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해.


  3) 인디아 페일 에일(IPA, India Pale Ale)


페일 에일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19세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수출하기 위해 개발되었는데, 당시 수출 항로가 너무 길어 맥주가 상하자 맥아와 홉 사용량을 대폭 늘려 저장성을 극대화한 맥주야.

일반적인 맥주에 비해 알코올 함량이 높고 쓴맛이 강하지만 재료 특유의 맛과 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강렬함 때문에 마니아층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어.


  4) 다크 에일(Dakr ale)


다크 에일은 검게 볶은 맥아를 사용해 검은색을 띄는 에일맥주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야. 종류로는 스타우트(Stout)와 포터(Porter)가 있는데 간단히 비교하면 스타우트는 아일랜드식, 포터는 영국식이라고 이해하면 될거야.

19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빈곤한 노동자들이 값싼 까만색 에일을 많이 마셨는데 주 소비층이 항구에서 짐을 나르던 짐꾼(Porter)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포터 라고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어.

스타우트는 맥주 양조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던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포터를 밴치마킹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해. 유명한 종류로는 기네스가 있다.


  5) 바이스비어(Weissbier)


다른 에일들이 영국에서 생산된 것과 다르게 바이스비어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이 원조야. 독일 바이에른에서 생산된 것을 바이스비어 그 외 지역에서 생산된 밀맥주는 바이젠비어(Weizendier)라고 불러 양조과정에서 밀 맥아가 50%이상 들어가는데 보리 맥아 맥주보다 만들기가 까다롭고 발효 진행이 매우 어렵지만 제대로 만들면 엄청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맥주야.

맥주 순수령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이 꾸준히 만들어 마시던 이유가 있어. 바나나와 비슷한 향이 나면서 밝은 노란빛에 탁한 색, 쓴맛이 매우 적기 때문에 부각되는 부드러운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 특징이야.

밀맥주는 발효에 사용한 효모를 거르지 않고 출하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색이 탁하게 보여. 따라서 제대로 즐기려면 살살 흔들어서 가라앉아 있는 효모를 같이 마시는 것이 좋아


   나. 하면발효


10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키고 저온 숙성하여 만들어지는 맥주야. 발효 과정에서 맥주 효모가 밑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흔히 라거(Lager)로 불리는 맥주라 하면 발효 맥주야


  1) 라거(Lager)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맥주로 1400년대 뮌헨에서 처음 개발됬어. 라거는 저장하다는 뜻의 독일어 Lagern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지.

지금의 라거 맥주의 큰 특징은 황금빛 빛깔인데 원래 오리지날 라거 맥주는 에일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빛을 띄었다고 해. 지금의 황금빛은 맥주회사들이 경쟁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야. 라거 발효 시 저온의 상태를 유지해야 해.

그렇기 때문에 냉장 설비가 없던 옛날에는 지하 저장고를 만들거나 추운 날에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어. 현대에는 냉장 설비를 쉽게 갖출 수 있어 어렵지 않게 양조가 가능하고 특유의 시원함과 청량감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가진 맥주로 성장했어. 묵직한 바디감의 에일과는 다르게 가벼운 바디감과 높은 탄산, 깔끔함이 특징이야


  2) 페일 라거(Pale lager)


페일 라거는 현재 팔리고 있는 황금빛의 일반적인 라거 맥주를 전부 포함하는 상위개념이야. 페일 에일을 만들 때 사용하던 페일 몰트와 홉을 이용하여 저온에서 하면 발효시킨 맥주야. 보통의 라거보다 더 연한 황금빛 색에 강한 청량감을 느낄 수 있어. 


  3) 부가물 라거(Adjunct lager)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부가물 라거는 미국에서 가장 시장 점유율이 높은 맥주야. 주 원료인 보리과 홉을 줄인 대신 값싼 다른 곡물을 첨가하여 생산 단가를 낮춤 보급형 라거지.

맥주 특유의 맛은 약하지만 가볍게 즐길 수 있어. 주로 들어가는 부가물에는 당분을 주기 위한 옥수수, 쌀 등 향을 주기 위한 초콜릿, 커피, 체리가 들어가. 대표적으로 미국의 밀러와 버드와이저, 멕시코의 코로나가 있어.


  4) 다크 라거(Dark lager)


스타우트처럼 검게 볶은 맥아로 제조한 라거야. 스타우트가 묵직한 쓴맛을 내는 것에 비해 부드럽고 강한 청량감 속에 훈연향이 느껴지는게 특징이지.

영어로는 다크(Dark), 독일어로는 둔켈(Dunkel)이라고 하는데 뮌헨산 맥아를 사용하면 특유의 진한 빛이 잘 난다고 해서 어두운 빛깔의 라거를 싸잡아서 둔켈 이라고 해. 위에서 말했듯이 초창기 라거는 어두운 빛을 띄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과거에는 ‘라거는 곧 둔켈’ 이었어.

뒤에 소개할 필스너의 시초인 골든 라거가 1840년대에 만들어진 후에야 라거와 둔켈이 분리되었지.


  5) 필스너(Pilsener)


위에서 소개한 페일 라거의 시초가 된 맥주야. 1840년 체코의 필젠이라는 도시에서 독일의 라거 제조법을 도입해서 생산했어. 기존의 라거보다도 훨씬 맑고 투명한 색이 특징이고, 쓴맛과 홉향이 더욱 강하지.

이런 독특한 풍미 때문인지 필스너는 출시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어. 필스너가 엄청난 인기를 끌자 원조였던 독일에서도 독일식 필스너 스타일의 라거인 ‘필스너 우르켈’을 출시하게 되. 우르켈은 우리말로 원조 라는 뜻이야. 지금은 필스너 스타일 맥주를 총칭하는 단어가 되었고 다양한 미국의 부가물 라거나 하이네켄, 칼스버그가 필스너의 제조법을 응용해서 생산하고 있어.

역사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상면 발효 맥주에 비해 다양성이 다소 떨어지는데, 하지만 지금도 여러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다양한 라거류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라거의 다양성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여


   다. 자연 발효 맥주(Lambic)


벨기에에서 유래된 이 맥주는 상면 발효도 하면 발효도 아닌 독특한 발효 방식으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생소한 람빅은 국내로 따지면 메주를 발효하는 식으로 술을 만든다고 비유할 수 있어.

상면 발효나 하면 발효는 특정한 효모에 의해 발효가 진행되지만 람빅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잡다한 균들을 이용해. 그렇기 때문에 보리와 밀로 만든 맥아즙을 나무 통에 담고 그대로 공기 중에 노출시켜 수년간 발효를 거치게 되지.


[람빅 맥주가 발효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 발효를 시켜도 나무 통마다 맥주 맛이 다르다고 하고 또한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기상 이변이 생기면 양조가 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 람빅은 다양한 원액을 혼합하거나 원액에 과일을 넣어 발효시키는 등 추가 과정을 거치고 시장으로 나오게 되는데 대체적으로 곰팡내와 텁텁함, 강한 신맛을 가진 것이 특징이야.

하지만 특유의 풍미 때문에 의외를 찾는 사람이 많아. 벨기에 서부에서만 만들어지는 맥주이기 때문에 양조장 수도 매우 적고 취향을 강하게 타서 국내에 수입되는 람빅 맥주는 매우 적어.


3. 맥주에 얽힌 일화와 축제

독일인들의 맥주사랑은 대단해. 그만큼 맥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각 도시, 혹은 마을을 대표하는 맥주가 있을 정도야. 1인단 연간 맥주 소비량 역시 세계 3위권이며 전문 맥주 양조 기술자 양성 기관을 두고 체계적으로 기술을 전수하고 연구한다고 해. 그렇게 때문에 독일은 맥주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아. 몇 가지를 소개해 줄게


   가. 맥주에 얽힌 일화

  1)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


맥주에 관련된 독일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야. 1516년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에 의해 제정된 이 법은 맥주 양조 재료를 보리와 물, 그리고 홉만으로 제한하고 가격을 통일시키는 법령이었어.

제각각이었던 맥주 제조법을 하나로 통일하고 규격화하여 조세를 늘리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행되었다고 하는데 현식은 곡물과 맥주에 의한 손익 관계를 둘러싼 교회와 영주, 그리고 상인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고 해. 맥주 순수령을 근거로 다양한 첨가물을 이용한 양조업자들은 맥주를 압수당하고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었지.

하지만 지배층이 즐겨 마시던 밀맥주 양조는 바이에른 공국 왕실이 독점한 상태에서 여전히 성행하였다고 해. 후에는 밀이나 호밀도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되었고 머지않아 폐지되었지만 현대의 다양한 맥주 회사들이 맥주 순수령에 따른 맥주가 전통 양조법으로 만든 진짜 맥주다 라는 마케팅 요소로 사용되고 있어


  2) 파르잠의 성 콘라도(Conrad of Parzhm)


콘라도는 19세기 독일의 카톨릭 성인 중 한 명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이며 맥주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있어. 콘라도는 수도원의 문지기 일을 하였는데 그러면서 수도원을 방문한는 이들에게 맥주와 음식을 제공하곤 하였다고 해.

후에 코라도의 성인 자격을 심사하는 자리에서 담당 조사관은 ‘여자들에게 음주와 혼취를 조장한 사람을 어찌 성인으로 추대할 수 있는 것인가?’ 라며 콘라도의 성인 추대를 반대하였지. 그러자 당시 뮌헨 대주교가 ‘맥주 두 잔 말이요? 독일 여성들이 고작 맥주 두 잔에 취할 리가 없잖소!’ 라고 반박했고 심사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여 성인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


   나. 세계 4대 맥주축제

  1) 독일 옥토버페스트


독일의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9월 15일 이후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10월 첫번째 일요일까지 16~18일간 열리는 가장 큰 맥주 축제야. 1810년 바이에른 공국의 초대 대공인 빌헬름 1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에서 시작된 이 축제는 200년이 넘어가는 역사를 자랑하지.이 시기만 되면 매년 60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축제를 방문하여 엄청난 양의 맥주와 음식을 소비해.

옥토버페스트의 개회식은 매우 독특한데 1950년 뮌헨 시장이 맥주 통을 개봉하면서 오 차프드 이즈(O zapft is : 맥주통이 열렸다) 라고 외친 것을 시작으로 옥토버페스트의 개회식 전통으로 자리잡았다고 해.

여담으로 1차, 2차 세계대전 때는 열리지 않았고, 1926년 축제 기간 중 폭탄이 터져 13명이 죽고 200명이 부상을 입는 최악의 사건도 터졌어.


  2) 일본 삿포로 비어가든


일본 삿포로의 맥주 축제인 비어가든은 삿포로 오도리 공원에서 개최되며, 매년 7월말부터 8월초 까지 열려. 운영시간은 매일 정오부터 21시까지 운영해.

삿포로 비어가든은 1959년 처음 시작되어 50년간 이어져 온 세계적인 맥주 축제야. 독일에서 맥주 양조를 직접 배워 온 일본인이 1876년에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을 만들면서 삿포로 맥주의 역사가 시작되었지.


  3) 중국 칭다오 국제 맥주 축제


칭다오 국제 맥주 축제는 8월 둘째주 주말부터 16일간 열리며 15시부터 22시까지 행사가 진행해. 다른 맥주축제들은 야외에서 진행하는데 반해 칭다오 맥주 축제는 실내에서 진행하고 있어. 칭다오 맥주축제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맥주 축제로 1991년 8월에 처음 시작했어.

칭다오는 과거 40년간 독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독일의 맥주 양조 방법과 칭다오의 맑은 물이 만나 지금의 칭다오가 탄생했다고 해.


  4) 체코 필스너페스트


필스너페스트는 필스터우르켈의 본고장인 체코의 필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리며, 세계적인 규모의 맥주 축제이자 체코 최대의 맥주 축제야. 매년 8월 말에서 9월 초 주말에 열려. 1842년 체코의 대표 맥주인 필스너우르켈의 첫 생산을 기념하며 개최되는 행사야.

체코는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이 세계 1위로 꼽힐 만큼 맥주를 즐겨 마시는데 필스너페스터에서는 필스너 우르켈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 또한 전 세계 대표 바텐더들이 참가해서 마스터 바텐더 경합을 벌이기도 해

우한폐렴이 종식되면 게이들도 찾아가봐라 이기이기


4. 토막상식(홉과 그 종류)

홉(Hopfen)은 독일이 원산지인 식물이야.



전통적으로 불면증이나 불안 증세를 해소하는 약재로 쓰였으며 차로 즐기기도 했어. 그리고 꽃을 맥주에 사용해. 특이한 것은 맥주에 넣는 홉은 무조건 암꽃이야. 수꽃은 맥주의 풍미를 채치는 불쾌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홉은 맥주의 맛과 향 그리고 품질 유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맥주 특유의 쌉사름함과 향기는 모두 홉에서 나오는 거야 또한 강력한 향균 작용과 산패 방지 작용이 있어서 식품의 보존을 위해서도 쓰였다고 해.

모두 홉에 포함된 알파산이라는 물질 때문인데 알파산은 맥주에서 쓴맛을 나타내는 물질의 총칭으로 생각하면 될거같아. 그리고 맥주에 사용한 홉의 알파산 함량에 따라 IBU 값이 달라져. IBU는 International Bitterness Units scale의 줄임말로 맥주의 쓴맛을 나타내는 척도야.

수치가 낮을수록 부드럽고 높을수록 바디감이 강하지. 보통의 맥주가 10~30사이이며 50을 넘어가게 되면 상당히 묵직한 쓴맛을 느낄 수 있어. 현재의 홉은 거의 맥주를 위해서만 재배, 사용되고 있고, 1919년부터 품종개량을 시작하여 약 100여가지의 품종이 개발되어 있다고 해. 

독일을 포함한 몇몇 북유럽 국가와 미국, 그리고 호주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99년까지 홉을 재배했다고 해.


  가. 미국의 3C hop


[왼쪽부터 캐스케이드 홉, 센테니얼 홉, 콜럼버스 홉이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품종의 홉이야. 캐스케이드(Cascade), 센테니얼(Centennial), 콜럼버스(Columbus) 가 모두 C로 시작하기 때문에 위 3가지 품종을 모두 3C hop으로 불러. 시트러스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고 쓴맛이 적어. 이 중에서도 케스케이드 홉은 국내의 카스 맥주에도 사용되고 있어.


  나. 아마릴로 홉(Amarillo hop)


상당히 귀한 홉 품종이야 IPA 양조의 핵심 재료인 아마릴로는 미국의 버질 가마체 농장에서 개발하고 생산하는 홉이며 특허까지 붙어 생산을 독점하고 있어.

가격도 보통 홉의 2~3배이며 소량 판매를 하지 않아 구하기가 어렵지만 크래프트 맥주에서는 최고급 홉으로 취급되고 있지


  다. 유럽의 노블 홉(Noble hop)


풍미와 알파산 함량이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르고 유럽 내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홉이야. 노블 홉들은 보통 알파산 함량이 낮기 때문에 맛이 부드러우며 은은한 향이 도는 것이 특징이야.

종류에 따라 강한 허브향이나 매콤함이 나기도 해. 대표적으로는 차즈(Saaz)와 테트낭(Tettnang) 품종이 있어


  라. 뉴질랜드의 넬슨 소빈 홉(Nelson sauvin hop)



뉴질랜드에서 개발된 품종으로 아마릴로와 함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에서는 최고급으로 여겨지고 있어. 고급 백포도주와 유사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어서 유명하지만 현재는 유일하게 뉴질랜드 크래프트 브루어리에만 공급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홉이야.


  5. 마무리

현대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로 맥주를 제조하거나 즐기는 문화가 발달해 있으며 맥주 간의 시장 점유율 또한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 불과 2~3세기 전만 해도 맥주 시장의 주류를 이루었던 에일 맥주가 라거에게 주류 자리를 넘겨주었고 이제는 수제맥주(Craft beer)가 대세지. 이에 따라 다양한 브루어리가 생겨나고, 영업을 하고 있는 추세야. 독자적인 비법으로 만든 특색있는 맥주들이 현대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어. 우리나라도 지역별로 특색있는 맥주가 출시되어 편의점을 점령하고 있지.


그리고 한가지 더 바로 홈 브루잉(Home brewing) 맥주가 있어. 말 그대로 집에서 해 먹는 맥주인데 맥주는 다른 술에 비해서 재료 원가나 만드는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

해외에서는 홈 브루잉이 활발한 편이고 국내에서도 홈 브루잉을 즐기는 비중 역시 늘어나고 있어. 보통은 홈 브루잉 전용 키트를 구입해서 입문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숙련도가 높아지면 자신만의 레시피를 개발하여 나만을 위한 수제 맥주를 만들어 즐길 수도 있지.

맥주에 관심 있는 게이들은 홈 브루잉 전용 키트 얼마 안 하니까 한번 시도해봐라. 좋은 추억거리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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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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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룩셈부르크 행위 예술가

드보라 드 로베르티스
Deborah-De Robertis는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한 미술작품 앞에 다리를 벌려 앉아

자기 신체 주요부위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퍼포먼스
performance를 함










드보라는 스스로 <기원의 거울>이라 이름 붙인

이 퍼포먼스를 한 이유로


“여성의 성기를 그리는 것은 예술인데, 보여주는 것은 왜

외설이냐?” 
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였다고 










오르세 미술관 측은 드보라의 이런 행위를 즉각 제지하였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문제가 아니라

미술관 규칙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의 문제이다”라고

제지이유를 설명하게 됨







이런 엽기적 퍼포먼스를 기획해 미술계를 도발하게 한 예술 작품은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66년 그린 <세상의 기원> 때문 임







<세상의 기원_L’ Origine du monde 1866 오르세미술관>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그림은 처음 공개 될때 사회적 파장이 너무 커

그려진 후 100년이 넘도록 공개되지 못하다가 1988년에야 비로소 

오르세 미술관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공개 되었음












오늘은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함









사실주의_Realism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理想化)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귀족들과 부르주아에게서 권력을 되찾아

절대왕정_Bourbon을 세우기 위해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22km 떨어진 베르샤유에 새로운 궁전을 신축하게 됨










바로크 양식으로 신축된 화려한 새 궁전의 내부를

더욱 화려하게 치장해 줄 장식품들이 필요했고

남성적 바로크Baroque미술과 여성적 로코코Rococo 미술

그렇게 프랑스에서 싹트게 되었음









<사비네 여인의 겁탈_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634-5 니콜라푸생>


바로크 미술은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루이14세는 절대왕정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설립하였고









<자화상_ 1650, 니콜라 푸생>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후원해

절대왕정을 빛내줄 프랑스 바로크 미술을 발전시켜 나가게 함









<그네_The Swing 1767,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루이 14세가 사망 하자 그 동안 절대왕권에 숨죽여 오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베르샤유 궁에서 보았던 화려함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려 노력 하였고 로코코 미술

이런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문화 욕구를 채우며

귀족문화로 자리매김 하게 됨









<랑부이에 후작부인과 최초의 살롱인 랑부이에 저택>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집을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고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미술 시장 <살롱>이 탄생 함










살롱을 중심으로 미술시장은 비약적으로 커져 갔지만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로코코 미술은 시들해져 가게 되어 버리고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_Le Sacre de Napoléon 1805-7 자크 루이 다비드>


미술의 유행은 르네상스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고전주의

작가의 감정, 상상력을 드러내는 낭만주의로 변화하게 됨



이전까지의 미술은 신화, 성스러운 종교화, 역사 이야기

주로 다루었고

왕족, 귀족, 부르주아 특권층 만의 전유물 이였음








미술을 포함한 예술은

예술을 접하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후원자의 입맛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에서만 존재했고

화가들은 그 후원과 지원 속에서 안정적으로 창작할 수 있었음










19세기 시작된 산업혁명은 미술계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만듬

미술시장이 대중화 되어 화가들을 후원자로부터

자유로워 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카메라의 출현은 미술의 대중적 관심을 사진으로 옮겨가게 해

많은 초상 화가들의 밥벌이를 위협하기에 이르게 됨  










더이상 후원을 기대할 수 없게된 화가들은 

퐁텐블로 외곽 바르비종
Barbizon 에서 모여 살며


"실내 아틀리에’에서 그리던 고전적이고 낭만적 자연이 아닌

자연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해 그리게 되면서,,,








<이삭줍기_Des glaneuses 1857 Millet>


자연주의Naturalism는 이렇게 시작됨








<삼등열차_The Third-Class Carraige 1862, 호노레도미에>


쿠르베는 도미에Honore Daumier등과 함께

이전 미술 인위성을 거부하며


"미적 대상은 현실과 왜곡된 것이 아닌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모습과 가치관을 보이는 그대로 정직하게 옮기는 것” 



으로 규정하며 자연주의에 심취, 열중하면서

자연주의 바탕에서 사실주의Realism는 싹티우게 됨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현실을 본대로 그린다”









구스타브 쿠르베_Gustave Courbet(1819~1877)








<〈샘〉_La_Source_1868>



“나에게 천사를 데려오면 천사를 그려 주겠다”

“내가 보지 않은 것을 절대로 그릴 수 없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1819년 6월 10일 부르고뉴 프랑슈콩테와 지방

오르낭의 부농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질리 쿠르베의

사이에서 태어났음
 








<질리 쿠르베_Zélie_Courbet 1853>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도가 되기 위해 왕립고등학교

입학하지만 쿠르베는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됨


부모의 전폭적 지원속에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온 쿠르베는

루브르 박물관 그림들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연구 하기 시작했고

스페인파, 네덜란드파, 베네치아파 등을 공부하며


특히 <렘브란트>의 그림에 푹 빠지게 됨









<검은 사냥개와 쿠르베_Courbet au chien noir’ 1842>


쿠르베가 23세 되던 1842년에 그린 이 자화상을 1844년 왕립

아카데미 후원 프랑스 미술가 전시회 ‘르 살롱_Le Salon’ 전

출품해 입선하게 되면서 쿠르베는 미술계에 등단 하게되었음
 








<프루동과 아이들_Proudhon-children 1865>


미술계에 등단한 쿠르베는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사회주의자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평론가 뒤랑티 

당대 지식인, 철학자, 평론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인정받았고 비평가와 대중들에게도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함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_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외젠 들라크루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상을 거부하는 것은
개인을 해방하는 것이고
결국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 미술이다”








<참회하는 막달레나_The Penitent Magdalen 1640, 조르주 드 라 투르>


"루이 13세의 궁정화가로 부와 명예를 같이 얻은
조르주   투르Georges de La Tour
고향에서 민심을 잃어
그의 가족 모두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돌 깨는 사람들_ 1849>


이상화로 만들어진 이야기 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가

때로는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전해 주기도 한다









<오르낭의 매장_Burial at Ormans 1849>

 “내가 노력하는 것은 전통의 온전한 지식으로부터 나 자신의
독립성과 나만의 개성을 합리적인 감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림에 사용된 물감이 아깝다”라고 사람들은 말들 하지만
나는 존재하는 사람들을 그림 안에 존재시켜 현실을 기록한다




1850년 파리살롱에 공개된 <오르망의 매장>은 비평가들에게

“그릴 이유가 없는 그림이다” “추하다” “황당하다”라는

비평을 받게 됨



<오르낭의 매장>은 쿠르베의 고향 오르낭에서 있었던

한 농부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작품 임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이상화된 숭고하고 영적인 의미의

그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리하며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결같이 평범하게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음 









쿠르베는 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을 실물 크기로
그렸내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전통 역사화의 경향을 소박하고 진실성이 담겨진
사실의 재현으로 신과 영웅들의 전유물이었던 존엄성을
40여명이 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부여하였다 









<샤를 보들레르의 초상 1848-9>



쿠르베는 1949년 살롱전에 11점을 출품해 그 중 7점이

전시되는 영예를 얻으며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됨


쿠르베는 당대의 예술가 중 오직 자신만이 대중의 생각과 감정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주장 하기 시작 함
 

그리고 그것은 곧 본질적으로는 가장 민주적이다라고 단언하며

대중을 향해 계몽적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기에 이름









<Louis Guéymard as Robert le Diable  Louis Guéymard, 1857>



쿠르베는 오직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였음


그는 일상에 널 부러진 모든 장소와 사물들만을

진실되게 그려야 한다고 믿었음









<목욕하는 여자들_The Bathers 1853>


그림 속 한 여인은 아름답지 않은 풍만한 몸을 반쯤 드러낸 채
목욕을 막 시작하려 하는 모습이고
또 다른 여인은 그녀를 돕는 하녀인듯 하다




쿠르베는 1853년 이 그림을 ‘르 살롱’에 출품 하였음


프랑스 낭만주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Delacroix

‘벗은 부르주아의 살찐 몸뚱아리와 엉덩이의 의미 없는 몸짓’이라고

혹평을 하였지만 그 평가 덕에 그림은 유명세를 타게 되어

고가에 판매 되었다고 함








<안녕하세요 쿠르베씨_The Meeting or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미술도구를 가득 맨 쿠르베는 들판 한복판에서 자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를 만났다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분명하겠지만
그림 속 쿠르베는 브뤼야스에게 매우 뻣뻣한 모습이다


오히려 브뤼야스와 그의 하인이 모자를 벗고
예의를 지키는 분위기이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농부들_Farmers of Flagey on the Return From the Market, 1850>


“이전 예술이 주는 환상과 허구를 벗겨 내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을 내세웠다”










파리 국제박람회_Paris Exposition Universelle












1855 파리에서 국제박람회가 개최되었음

쿠르베는 자신의 그림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림들은 박람회 주최로 부터 전시를 거부당하게 됨









<알프레드 부뤼야스_Portrait of Alfred Bruyas, 1854>


그러나 쿠르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의 도움으로

박람회 맞은편에 전시장을 빌려 개인전을 열수 있었음









<화가의 아뜰리에_ L`Atelier du peintre 1855>


“예술가로서의 나의 7년을 담은 자서전과 같은 작품이다 
이 그림을 통해 현재 프랑스가 처한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나는 이 전시회를 리얼리즘_Realism이라 이름 붙혔다”



쿠르베 자신과 여성모델, 어린이를 캔버스 중앙에 두고

오른쪽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철학가, 작가, 시인 들을 그려 냄


그리고 왼쪽엔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을 그려 놓음으로

개혁에 실패한 프랑스 계급사회를 비판하고자 하였다고 함










쿠르베는 관능미가 살아 있는 누드화를 통해 여성미를 강조했음

여성들의 삶을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 여성이

섹슈얼리티의 대상이 아닌 평범한 인격임을 나타내고자 하였음








<하얀 스타킹을 신는 여인_ La femme aux bas blancs 1861> 


과거에 없던 독특한 구도의 그림 속 여인은
전혀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상념에 젖은 듯 허공을 응시하는 여인은 몸을 팔아
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매춘부
 이다









<기대 누운 누드_ Femme nue couchee 1862>


“전형적 누드화처럼 보이지만 여성 모델의 다리에는 하얀 스타킹과
구두가 신겨져 있고 한쪽으로 반쯤 내려간 스타킹은
아름답다기 보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 살갗은 피부 밑 핏줄이 보일 정도로
사실적
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헝가리 컬렉터 ‘페랭 하트바니’의 소장 작품으로

부다페스트 은행 금고에 있었던 것을 1945년 2차세계대전 중

러시아 군에 의해 약탈되었다가 2007년 파리 그랑팔라스에서

전시되며 첫 공개 되었다고 함



2015년 11월 9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560만달러(약 165억원)에 낙찰되어

쿠르베 작품들 중 최고가를 기록했음









<아름다운 아일랜드 소녀 조_  1866>


긴 웨이브 머리의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른손엔 손거울을 들고 왼손으론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다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희고 볼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하고 긴 생각에 잠긴 것도 같다



모델인 조애나 히퍼넌이란 아일랜드 여성은 <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녀는 사실 쿠르베의 동료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모델이자 오랜 연인이었다

가난한 이민자의 딸이었던 그녀 역시 화가였지만
생계를 위해 모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 통념상 특히 누드모델은 창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기에
휘슬러의 가족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그림은 세 사람이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함께 지낼 때

그려졌다고 하며


쿠르베가 가장 아끼던 초상화이기도 했다고 함









<노르망디 해안_ Sea Coast in Normandy 1867>


당시 쿠르베는 47세, 휘슬러는 32세, 조는 23세로

쿠르베에 비해 나이 차가 많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함 



쿠르베는 붉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조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거의 똑같은 그림을 네 점이나 그렸음 


특히 이 그림은 쿠르베 자신이 소장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평생 누구에게도 팔지 않았다고 함








거울을 본다는 건 자신을 응시하는 행위다
쿠르베는 조가 거울을 보며 스스로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인지
자각하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그녀의 소소한 일상마저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노르망디에서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는 이듬해 파리로 가서 쿠르베의 논란 많은 누드화
<세상의 기원>의 모델이 된다

변치 않는 우정은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 조와 휘슬러는 연인관계를 청산했다









<잠_ Le Sommeil 1866>


여성 동성애는 시대를 불문하고 금기 시 되었던 주제였다

그런데 나는 신화나 전설을 빌려 오지 않고
그냥 보이는 데로 적나라하게 그렸다


두 여인의 미묘하게 다른 살갗 피부색은 만져보고 싶을 만큼
투명하게 관객에게 전달 된다




잠에 빠져 엉겨 있는 두 여인은 분명 레즈비언 커플임

흐트러진 머리, 침대 위에 떨어진 장신구는 두 여인이

지금 막 열정적 사랑을 끝냈음을 알려 주고 있음


쿠르베는 이 작품을 대중들에게 공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대담하게 동성애를 표현했음 


당시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누드화였지만,

현실 속 여성의 누드를 표현하면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에로틱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들은 역사 속 인물이나 신화의 내용을 빌려와

표현 해야만 했음 










파리 코뮌_La Commune de Paris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파이프를 물고있는 남자_L’homme a lapipe Man with a pipe 1848-9>



쿠르베는 자신을 ‘타고난 공산주의자’라고 선언 할 만큼

사회주의를 찬양했음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며 일어난 1848년 2월 혁명은 쿠르베에게

이상적 국가 건설의 꿈과 같았다고 함



2월 혁명이 실패하면서 일상을 사는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하루를 견뎌 살아가는데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었고

쿠르베는 그런 상황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에게 불만을 갖게 됨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하면서 제2제정이 무너지자

제3공화정이 선포 됨




1871년 3월 18일 파리코뮌_혁명정부가 수립되며 나폴레옹 3세에게

충성하는 베르사유군 및 독일군과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됨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군이 프로이센군과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을

불명예스럽게 받아들였고 당시 미술가 동맹 회장이던 쿠르베는

‘코민 평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지나치게 참여 하며

코뮌의 혁명 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됨









코뮌이 정권을 장악하자 주동자들은 방돔 광장

나폴레옹 1세 방돔탑을 철거 해버림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게 파리 코뮌은 진압되었고

코뮌을 주도하던 주요인사 대부분이 프랑스 외로 망명하게 됨 



6월 7일 파리에 남아있던 쿠르베는 친구 집에서 체포 되었음









곧 군사재판이 열리며 쿠르베에게 비난의 화살들이 쏟아졌고

6개월의 형을 선고 받은 쿠르베는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는 치욕을 겪게 됨




새 정권은 나폴레옹 1세 방돔탑을 다시 만들기로 했고

금화 50프랑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을 쿠르베에게 청구하게 됨









<오르낭에서 저녁식사 후 1849>


쿠르베는 파산을 면하기 어려워지자 1873년 7월 23일 스위스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플뢰리에’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하게 됨









<쥐라산맥_Stream in the Jura Mountains 1872-3>


“풍경화를 간단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들이 과연 그 풍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그리는가" 




그러다 프랑스와 거리가 먼 ‘라투르드펠즈’로 거쳐를 옮긴 쿠르베는

봉포르라는 낡은 모텔을 구입해 그 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남은 일생을 살다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 함









<뉴샤틀 호수_The Lake Neuchâtel, 1875>




쿠르베는 죽을 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함

“내가 죽거든 자유의 규칙 외에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다고 말하라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공화주의자,
혁명이 의미하는 모든 것의 지지자이고 무엇보다도 우선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에필로그









<절망적인 남자_The Desperate Man 1844-45>


쿠르베의 이 자화상은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지가 뽑은

‘정신나간 미술 베스트 10’

고흐 <귀를 자른 자화상>과 함께 뽑히기도 했음





쿠르베는 사실주의 화가였지만 자신의 자화상은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음



쿠르베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Realism”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함









<파도와 여인_The Woman with Wave 1868>


사실주의적 표현은 화가들이 후원자들의 영향력에서 벋어나

자신의 사상과 예술 철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예술 풍조 변화는 인상주의로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음







TIP. 사실주의 미술과 사진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회화에서는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보조 기구를 데생에 사용했음









카메라 옵스큐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장치로 화가들은

이 기구를 이용해 조그만 구멍이나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광선을

거울에 반사시켜 유리에 맺히는 상을 그대로 옮겨 그리곤 했음









이 같은 표현은 사실주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사실주의 화가들이 주창했던 ‘구체적 예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에대한 관심이 1827년경 루이 자끄망테 다게르에 의해 고안된

다게레오 타입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더욱 고조된 것임


그리고 사진이 현대 생활의 실상을 표현해 내는 예술 매체로

정착하기까지는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부정 할 수 없겠음








<가르강튀아_Gargantua 판화, 도미에 1831>



쿠르베의 작품은 이후 스냅사진의 효시가 되었고

도미에의 풍자화는 보도사진의 표본처럼 여겨지게 되었음


사실주의 회화와 사진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해낸다>

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주의 작품은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에 그치지 않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철학적 목적이 있었음










구스타브 쿠르베가 살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 왕권파와

공화정의 치열한 권력싸움이 있던 시기였음


계몽주의사상이 전 유럽을 휩쓸던 때이고 칼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1847 <공산주의자 동맹>을 설립하며 세력을 확대하던

시기이기도 했음


계몽주의로 개인적 인간 삶에 눈을 뜨던 대중에게 산업혁명 이후

부를 쌓는 자본가는 빈부갈등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음


분노한 대중에게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 처럼 보였을 것임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공산주의의 국가 이상은 1991년 소련의 붕괴와

북한의 경제위기로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미 증명되었음









150여년 전 프랑스에서 휘몰아 치던 이념의 계급 갈등이

대중을 선동하는 한줌의 조무래기들에 의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 글을 써봄









문화예술인은 자기분야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150여년 전 구스타브 쿠르베는 본인의 삶으로

2021년의 우리들에게 잘 증명해 보이고 있음


지금도 국민을 선동하려는 많은 연예인들의 미래모습이

쿠르베와 다르지 않을것 임..
 





오늘도 긴글 끝까지 읽어 주어 감사드림. THE END







세줄요약

1. 구스타브 쿠르베는 재능 있는 화가였음

2. 누드화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임 

3. 선동의 재료로 쓰이다 버림 받고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디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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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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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inance.yahoo.com/news/new-york-excelsior-pass-covid-19-vaccine-passport-152722058.html



뉴욕, 주정부 차원에서 백신여권 발행 시작.
1차 2차 접종 완료하면 받는 건데
이거 있어야 식당, 카페, 공연장, 야구장,
볼링장, 비행기 탑승 등등이 가능해짐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미 전역에 확산될 경우
외국인도 백신여권 없으면 미국 못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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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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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위스의 대기질 분석업체인 IQAir 에서 2020년 세계 대기질 보고서를 발표함

 

보고서 링크: https://www.iqair.com/ko/blog/press-releases/covid-19-reduces-air-pollution-in-most-countries

 

단위는 PM2.5 (㎍/㎥, 초미세먼지)

2020년 1월부터 12월까지 한 해 동안 초미세먼지 평균 농도임

 

아주 좋음: 0~10 ㎍/㎥

좋음: 10~12 ㎍/㎥

보통: 12.1~35.4 ㎍/㎥

민감한 사람에게 나쁨: 35.5~55.4 ㎍/㎥

나쁨: 55.5~150.4 ㎍/㎥

매우 나쁨: 150.5~250.4 ㎍/㎥

위험: 250.4 ㎍/㎥ 이상

 

 

2020년 세계에서 가장 대기오염이 심한 국가


 

1위 방글라데시

2위 파키스탄

3위 인도

4위 몽골

5위 아프가니스탄 

6위 오만

7위 카타르

8위 키르기스스탄 

9위 인도네시아

10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

.

.

14위 중국

41위 한국

51위 마카오

60위 홍콩

62위 대만

82위 일본

84위 미국

 

 

2020년 세계에서 가장 대기오염이 심한 수도


 

1위 인도 뉴델리

2위 방글라데시 다카

3위 몽골 울란바토르

4위 아프가니스탄 카불

5위 카타르 도하

6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7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8위 바레인 마나마

9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10위 네팔 카트만두

.

.

.

.

14위 중국 베이징

33위 한국 서울

43위 마카오

53위 홍콩

64위 대만 타이페이

72위 일본 도쿄

84위 미국 워싱턴 DC

 

 

 

대륙별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


 

남미


 

 

보고서에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2019년 대비 2020년 주요 도시의 대기질이 베이징 (-11 %), 시카고 (-13 %), 뉴델리 (-15 %), 런던 (-16 %), 파리 (-17 %), 서울 (- 16 %) 감소했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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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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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남녀가 성인이 되면 선을 통해서 일찌감치 결혼해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였음.

옛날 사람들은 여러 이성을 환승하지 않고 조건맞는 이성이 생기면 즉시 결혼으로 직행했음.

우리 부모 세대들을 보면 20대 초반에 결혼한 케이스도 드물지 않음. 중매결혼이 일반적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연애결혼이 대세인 시대가 되었는데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의 본 취지에 비추어보자면 

옛날식이 이상적이다. 처녀총각끼리 만나서 기본적인 조건만 확인한 후 결혼하는 케이스가

백년해로할 가능성이 가장 높고 소위 신혼생활에서도 깨가 쏟아진다고 볼 수 있음.

뭐, 결혼 전에 여자를 많이 만나봐야 여자보는 눈이 생긴다는 둥 안 그러면 늦바람이 난다는 둥 하는데

딱 잘라서 말하지만 그거 전부 다 개소리다. 이성경험이 결혼생활에는 마이너스 밖에 안 된다.




그 이유인즉 결혼생활이 안정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헌신해야되는데 카사노바같은 것들은

결혼 전에 많은 이성들을 만나고 다녔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틈만 나면 전에 만난 이성과

현재의 배우자를 비교하거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 걔는 외적으로 훌륭했는데.." "얘는 왜 이렇게 못 하지?" "전에 걔랑 왔던 곳이네." "걔는 지금쯤 잘지내고 있을까?"

이러고 앉아있기 때문이지. '신혼생활이 깨가 쏟아진다'는 말이 옛날 말이 되어버린 이유 또한

과거에는 기본적인 조건만 확인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로 신혼생활이

깨가 쏟아졌지만 얘들은 결혼 전에 이미 남녀 간에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기 때문에 아무런 설레임이 없거든.

와이프랑 데이트를 한다 치더라도 어지간한 데이트 코스는 다 돌아다녀봤고 어지간한 건 다 해봤음.

그러니까 자극과 감흥이 없음.

쇼윈도 부부가 되기에 딱 좋은 거고 쇼윈도 부부라도 되면 다행이지

불륜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정파탄으로 늘그막에 고독해질 가능성이 높다.

미혼 시절에 프리하게 놀다가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산다?

답답해 미칠 것 같거든. 아예 결혼을 못하고 늙는 케이스도 많음.

젊을 적에 여러 이성들에게 사랑받은 만큼 나이가 들어서는 외로워지는 거지. 게다가 수없이 환승을

해봤기 때문에 결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부부관계가 어그러지더라도 이를 시정할 생각을 안한다.


 



그런 이유로 현대 사회에서 이혼율이 높아진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받고 있는 게 자유연애다.

물론 남자의 경우에는 이 여자 저여자 만나고 다닐 수 있는 능력자는 일부일 뿐이지만

결혼제도와 자유연애는 호환이 안 된다.

모두에 이야기했지만 가장 이상적인 결혼 방식은 옛날식으로

처녀총각들이 서로 기본적인 조건만 확인하고 이른 나이에 일찍 결혼해서 애도 일찍 낳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 생식세포의 건강성은 20대 초반에 정점에 이르며 그 이후론 서서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서로 간에 비교하고 계산하고 안 피곤하냐? 그렇게 재고 따져봤자 결과값이 달라지는 게 아님. 

닳을 대로 닳은 애들은 결혼생활의 행복 마일리지를 결혼 전에 다 끌어다써버린 것으로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혹시나 미혼일 때는 신나게 자유연애하고 결혼하면 가정에 충실해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한계총량이라는 게 있다 이 말이다.


한줄평

자유연애와 결혼제도는 상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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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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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당시 정신나간 기술력으로 그 물량 많던 소련을 모가지 따이기 직전까지 몰아갔던 나라.
그들의 정신나간 무기 프로젝트들을 ARABOJA.


1. 나치의 UFO 계획: 프로젝트 하우니브

프로젝트 하우니브. 말만 들어도 오싹해지는 이름이다.
직접 실전에 나가본 적은 없다하지만 설계도와 사진, 실제 비행 테스트 기록이 존재한다.
이 하우니브의 정체는 나치가 운지하고 미국이 나치 연구소 자료들을 털때 나온 것이다.

V-7 HAUNEBU라는 제목의 문서.

먼저 1942년의 
하우네브 마크 1 문서를 보자.


저 위에 나치 친위대 SS 로고가 보이지? 친위대가 관리한 설계도라는 것은 의미가 어마어마해.
히틀러가 직접 관장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나치에게는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였다는 것이지.

거두절미하고 첫번째 하우네브인 하우네브 마크 1의 스펙을 알아보자.

승무원 8명 탑승 가능
지름 25미터
최고 시속 4800키로


이게 실감이 안 날 게이들에게 알려준다. 지름 25미터는 테니스장 정도 크기고
최고 시속 4800키로라는 건 소리 속도의 5배에 가까이 날았다는 것이지.
현시대의 미사일도 저정도의 속도는 따라잡지를 못해.

알짜정보: 하우니브 라는 이름은 이 프로젝트가 하우니부르크 지방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우네브의 진화: 하우네브 마크 2


설계도  HAUNEBU 옆에 붙은 2 숫자가 보이지?
하우네브 마크 1을 개량한 마크 2다.

전작에 비해 스펙이 매우 올라간 모델이지.
스펙을 알아볼까?

승무원 9명
지름 26미터
최고 시속은 무려...210000키로미터
비행 시간 55시간


이 하우니브 2는 실전투입 언급이 있었으나, 목격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 매우 빠른 항속 거리와 스텔스 기능으로 탐지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마지막 진화: 하우네브 3



저 설계도의 3이 보이지? 나치의 마지막 발악이라 할 수 있는 하우네브 3야.

지름 71미터
승무원 32명
최고 시속 40000키로미터
110미리 회전포탑 4문
80미리 회전포탑 10문


공격력과 크기를 올린 말그대로.....스타워즈에 나오는 스타디스트로이어를 연상시킨다...

이 모델은 실제로 무솔리니의 국방보좌관인 루이기 로메리사가 목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비행물체는 기존과는 다르게 매우 특이한 형태였고 전체모양은 둥글었으며 조종석은 유리돔으로 되어있었다..."
그가 남긴 증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행접시가 연상되지 않는가?

실제로 연합군 조종사들은 전쟁중에 "미확인 비행물체"들을 여러번 목격했고,
이는 "푸 파이터", FOO FIGHTER 라는 이름으로 도시전설로 남게된다.
푸 파이터를 목격한 연합군 조종사들의 증언은 이러했다.

"1942년  공습 당시 매우 빠른 접시 모양의 비행체가 주변을 고속비행했다. 어떠한 공격도 없었고, 적대성도 없어 보였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는 독일이 처음 하우니브를 만든 1942년과 일치하며,
하우니브의 특성인 접시모양,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라는 특징이 일치한다.
또한 적대성이 안 보였다는 것은 하우니브  1과2는 아예 무기를 장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비행이 시험비행 차원이었을 거기 때문이라고 해석이 된다.


마지막 이야기: 하우니브의 비행 원리

비행체의 위쪽에 + 전류를 흘리고

비행체의 아래에 - 전류를 흘리는 게 기본 원리다.

자 그러면 비행기 위쪽하고 공기가 만나겠지?
근데 공기에는 - 성질을 띠는 전자가 있다.
근데 비행기 위쪽은 + 전하를 띠기 때문에
비행기 위쪽의 + 전선이 공기의 - 전하를 전부 따먹게 된다.

이때, 원래 중성상태에서 - 와 + 의 균형을 이루고 있던 공기가 - 전자를 전부 따먹힌다면 
공기는 극도로 강한 +를 띠게 된다.

그리고 이때 +가 되버린 공기는 비행기 밑에 있는 -전류가 흐르는 쪽으로 전기적 끌림에 의해  쫘---악 내려가면서
비행기를 위로 밀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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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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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는 지난 2011년 1월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 방중에 맞춰

 

미국 F-22와 비슷한 성능의 스텔스 전투기 젠-20 시험 비행을 실시함

 

 

 

 

 


 

 

 

 

당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젠-20 관련 성능에 의문을 가졌지만

 

개발속도가 빠르다고 평하기도 했음

 

 

 


 

 

 

 

 

 

 

이후 짱깨국은 2017년 11월 젠-20 전투기를 실전배치 하고

 

세계 공군력 2위가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자축하며 홍보 함

 

 

 


 

 


 

 

 

 

 

 

 

하지만 짱깨국 기술력을 의심하는 기사도 있었음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2912646616123096&mediaCodeNo=257

 

 

 

 


 


 

 

 

젠-20 전투기의 스텔스 기능은 둘째로 치더라도

 

엄청난 기체 무게를 견뎌줄 <엔진> 개발 문제를 의심 하게 됨

 

 

 

 

 

<러시아산 전투기 엔진을 복제한 WS-10>

 

 

 

젠-20과 같은 5세대 전투기 핵심 성능인 <슈퍼 크루징> 

 

즉, 초음속 순항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느냐에 따른 의혹으로

 

슈퍼크루징 엔진을 개발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 뿐이고 

 

 

러시아도 최신에 스텔스기인 Su-57에 기존 엔진을 장착해

 

아직 시험비행하는 실정이기 때문 임

 

 

 

 

 

 

 

 

 

그러던 중 미국이 일본에 수출, 자위대에 배치한 F-35A 전투기가

 

훈련중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 함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4/2019041401739.html

 

 

 

 


<일본 자위대에 배치된 F-35A 스텔스 전투기>

 

 

 


 


 

 

 

당시 추락한 전투기 잔해를 찾기 위해 미국, 일본, 한국 뿐만 아니라

 

짱깨국, 러시아까지 함대를 파견해 수색하는 첩보전이 연출되었음

 

 

 

 

 

 

그러면서도 짱깨국 다운 조롱이 더해짐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904111590344956

 

 

 


 


 

 

 

 

 

 

 

 

짱깨국은 분쟁이 있는 지역마다 젠-20 전투기를 배치해

 

상대에게 유력시위로 공포심을 갖게 함

 

 

 


 

 

 


 

 

 


 

 

 

 

 

 

 

 

 

 

 

그런데 최근 젠-20에 큰 문제가 발생 함

 

바로 <엔진> 문제 임

 

 

 


 

 

 

젠-20은 러시아산 AL-31F 엔진을 사용하다 이 엔진을 복제한

 

짱깨산 WS-10 엔진을 장착 하고 있었음

 

 

문제는 두 엔진 모두 젠-20의 무거운 기체를 감당할만한 추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임 

 

 

결국 러시아 수호이-57에 들어가는 AL-41F1엔진을 수입하려 했지만 

 

짱깨의 복제를 우려한 러시아가 판매를 거부해버림

 

 

 

 


 

https://www.yna.co.kr/view/AKR20180211056600074

 

 

 

하는 수 없이 추진력을 대폭 끌어올린 WS-15라는 엔진을

 

자체 개발했는데, 이 엔진이 계속 말썽임 

 

 

엔진 내부 온도가 섭씨 1350도를 넘어가면 갑자기 출력이 떨어지고

 

지상 시험 도중 폭발하는 일이 생겨버림

 

 

 

 

 

 

 

 


<우크라이나  모터 시치>

 

 

 

제트 엔진 개발은 항공기 개발보다 어렵다고 함

 

기술개발에 20년 이상 노하우와 높은기술이 필요해 

 

전세계 제작 가능 국가가 4~5개국 뿐이 안된다고 함

 

 

 

짱깨국은 옛소련 군용기와 민간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우크라이나기업

 

<모터 시치>에 눈독을 들임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적대관계가 되면서 주문이 끊겨 경영난에 빠진 모터시치 지분을

 

짱깨는 버진아일랜드, 마다가스카르 등에 적을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50% 넘게 매집을 함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911171713058271?did=PA&dtype=3&dtypecode=3391

 

 

 

미국은 15억 달러 이상 군사원조를 약속하고 짱깨국과 거래 중단을

 

우크라이나에 요구함

 

 

짱깨국 무역 의존도가 높던 우크라이나는 고심 끝에 미국 손을 들어 줌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략방위산업을 짱깨에 넘겨줄수 없다며 

 

<모터시치>를 국유화 해버린 것

 

 

 

그러자 짱깨는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35억 달러 손해배상을 청구 함

 

 

 

 

 

 

 


 

https://www.yna.co.kr/view/AKR20210108054900009

 

 

 

 

짱깨국은 말썽많은 WS-15 대신 개량된 WS-10C 엔진을 

 

젠-20에 장착한다고는 하지만.. 기술력은 .. ㅋㅋㅋ 

 

 

 

 

 

 

 

 

세줄요약

 

1. 3월11일 끝난 전인대에서 올해 짱깨 국방비 2090억 달러 배정함

2. 그 국방비로 스텔스 전투기 젠-20 100대  실전배치 해 주변국 위협할 예정 임

3. 근데 스텔스 전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제트엔진이 메이드인 지나라 크게 걱정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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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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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이 저꼬라지된건

자업자득이다. 팔레스타인이 무조건적 피해자는 아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에 똥싸놓고 해결이 불가능해서

유엔에 공 넘기고 튄건 다 알고있을거다.

거기서 유엔이 2국가 병립안 (분할안)을 제시했어.

 

 

물론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아랍인들은 부글부글 끓었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아랍지역에 비아랍계 국가가

태어나는건 아랍인 입장에선 극대노할 일이었어.

얘네들이 뭔데 우리 앞마당에 진을 치려하냐? 싶었지.

 

그러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오해.

아랍인들의 땅에서 이스라엘 유대인애들이 침략을해서

땅을 뺏어간거아니냐? 하는거야.

 


 

기존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의 지도야.

오스만이 이슬람이고 이지역민들은 모두 아랍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스만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 통치체제와는 약간 다른 행정조직을 갖고있어.

 

세력권이고 통치를 하고있긴 하지만

직할지를 제외하곤 총독이나 주지사 등을 파견하여

사실상 자치를 주고 있던 것이지.

즉 완전한 지배는 하지 않았던 곳이었어.

 

그리고 이 다음 지도를 보자. 물론 아까봤던거지만

 


 

 

아랍국들의 국경을 잘 봐봐. 직선이 많지?

또 사우디나 시리아 이집트... 등의 국가들. UAE까지 해도

왕조국가들이나 공화정 국가들이나...

그냥 아무 나라나 검색만 해보면 독립 연도가 상당히 늦어.

게다가 국경도 찍찍 그어놓았는데도 아프리카와 달리

영토분쟁도 적은 편이지.

 

 


 

이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도 있어.

물론 티레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등의 기존 대도시들에서

정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막 특성상 대부분

주인이라는게 없었지. 사막은 그저 지나가는 곳일 뿐.

 

이지역 국가들의 독립도 늦고 국경이 일자로 그어진것도

민족의식이고 국가의식이고 그딴거는 아예 없던거야.

그냥 다 아랍인일 뿐이었고 기존 십자군 지역 쪽에서

아르메니안 정교회나 기독교도 유대교도들이 있던거지.

레바논도 아랍국같아 보이지만 대통령은 법률적으로 반드시

기독교도가 차지하는 국가야.

 

 

여튼 여기까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 국민 주인의식같은건 뭣도없던 곳이라는거지.

이제 대표적인 오해.

 

"2천년전에 망한 놈들이 그 구실로 침략하고 뺏었다"

라는 환상이 뜯어지는 순간이야.

주인이 있던것을 뺏으면 그건 침략이고 강도인데

주인조차 없었지.

 

 

유대인들도 2천년전에 이미 쳐나갔고

이땅엔 관심이 1도 없었어.

이미 유럽으로 다 빠져나가서 자기들 기틀 잡아놨는데

사막에 기반도없는 거지같은 땅을 가지고 싶겠니?

 

 


 

물론 프랑스혁명 등의 계몽시대를 거쳐서

유대인들에게도 시오니즘이라는 하나의 운동이 생겼어.

18세기 국가주의, 국민주의, 민족주의가 나오면서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이 우리도 국가를 만들자.. 하고

벌이던 운동이었지. 그러면서 지목된 땅은 2천년전에

나갔던 가나안땅이었어.

 

당연히 위에 말한대로 유대인들은 시큰둥했지

기반을 다 버리고 굳이 그 땅에 가야되냐? 하고.

국가가 있으면 좋긴하겠지만 유럽을 버릴 이유까진 못됐지.

 


 

그렇게 시오니즘은 유대인들한테도 외면받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독일의 유대인 정책에 오히려 힘을 받게돼.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외면하던 것이었으나

자신들의 국가가 없던 결과를 겪어보고 나선 경악을 하게되지.

 

히틀러의 의도와는 다르게 본의아니게 히틀러 덕분에

유대인들은 국가를 가져야 할 명분이 생긴거야.

 

또한 열강들 역시 양대전이후 식민지들을 청산하는 분위기에

아우슈비츠의 광경에 경악한 승전국에선 오히려

유대인들의 독립을 지지하게 되어버려.

 

그렇게 아랍국들도 하나하나 독립하고

아랍에서도 뒤늦게 자신들끼리 뭉치려하지.

거기에 문제가 발생한게 이스라엘이야.

 

영국이 아랍과 유대인들 양쪽에 다리를 걸쳐놓고

자기들이 손들고 빠지게된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거지.

 

이스라엘의 건국 당위성도 있고

아랍의 여론도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유엔에선 분할을 결정했지.

 

 


 

다시 이 지도를 보자. 지금의 자치구와는 달라.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영토가 더욱 넓었고

핵심인 예루살렘 및 서안지역은 모두 아랍계였어.

다만 유대인들은 남부 사막과 중서부 해안을 가졌지.

또 예루살렘은 유엔중립지가 되고.

 

실질적 이스라엘의 수도역할을 하는 텔아비브는

중서부 해안. 그 아무것도없던 황무지에 건설된거야.

 

지금 지도와 비교하면 아랍계가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지.

 

수용소의 아픔을 겪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땅이

생겼다는 기쁨에 차있었지만 아랍국들은 반대했어.

비아랍국가를 원치 않았던거지.

게다가 쪽수만 봐도 아랍은 이스라엘을 뭉개버릴 정도니까..

 

아,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단순 영국에게 독립만 약속받은건

아냐. 이지역의 땅을 유상으로 계속 매입하던 상태였어.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쫓겨났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감차이야. 쫓겨난건 당연히 아니고.

 

영국은 빤스런을 준비하고있었고

아랍인들은 쪽수로 유대인들을 뭉개버릴 생각을,

유대인들도 그걸 뻔히 알고 있었어.

 

유대인과 아랍인들 모두 영국군이 빨리 쳐나가길 기다리면서

무기와 병력을 모으고있었지.

영국은 분위기 알지만 끼고싶지도않고 자기들도 급한데...

빨리 빤쓰런을 해야겠다 싶었지.

 

당연히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영국이 가면

전쟁날걸 다 알고있었고, 전쟁에 휘말리기 싫어서

일단 도망친거야. 아랍국들도 일단 나와라.

우리가 뭉개버리고 그때 안전해지면 돌아가라 하고

안심시키면서 팔레스타인 탈출을 한거야.

이걸 쫓겨났다라고 하는건 좀 아니지.

 

 

 


 

 

그렇게 이스라엘은 세워졌고

영국군이 철군함과 동시에 아랍군의 선공으로

제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시작돼.

 

 

다만 이 글을 어느정도 읽었다면 맥락상 알겠지만

유대인들은 수용소의 고통에 절실했고 압도적 소수로

뭉쳐있던반면 아랍국은 이제 갓 독립된 국가들이고

여전히 국민주의 국가주의같은건 개뿔도없던

오합지졸이었어.

 

아랍국도 이스라엘도 유럽에서도 모두 이스라엘이

무너질거라 생각했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했지.

 

 

자, 여기서 이제 우리는 생각해봐야돼.

당연히 이길줄알고 도망갔던 아랍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게 지금의 팔레스타인인들이야.

자업자득이라는게 괜히있는게 아니거든.

 

게다가 잠깐 도망갔다올생각에 챙긴것도없었고

주변국에서도 패전도 패전이지만 쥐뿔도없는 난민들을

챙길 이유가 없었어. 이제 폭탄돌리기가 시작된거지.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명분이 있어서

도망간 팔레스타인인들에겐 국적을 주지 않았고

어차피 줘봐야 적대세력이니 줄 이유도 없었고.

이스라엘 인구 중 20%가 무슬림인데 이들도

이스라엘에 협조를 한게 아니라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야.

 

이스라엘에선 무슬림이라 부담되지만 국적은 줘야되어서

할수없이 준거고, 아랍인들은 이들을 배신자로 찍어놓고

같은 무슬림이라도 테러를 자행하지.

 

 

결국 이스라엘도 주변국도 모두 난민들을 일부만 받거나

아예 받질 않아서 사실상 무국적자로 살고있는게

팔레스타인인들이야.

 

그리고 직선국경얘기도 했듯이 없던 국경이

갑자기 생겼다는것, 즉 그들은 정주민도 아니고

주인도 아닌 그저 유대인들이랑 똑같은 이방인이라는 것.

 

 

그러나 이스라엘인들도 자신들의 인구가 주변국대비

너무 부족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어.

현실에 맞게 팔레스타인과의 병존을 인정하고

자치지역을 인정했지.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극우적 행동을

하진 않았어. 그렇게 온건파 노동당의 집권이 이어졌지.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계도 경악 이스라엘도 경악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아.

이 사건을 계기로 온건파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국민들도 현실적인 선택에 동의했지만

이질성의 현실도 인정을 하게돼.

 

 


 

유엔학교를 백린탄으로 날렸다는 뉴스를 보면

이스라엘이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병원이나 유엔지역을 처음부터 공격한건 아냐.

다만 자신들의 전력이 부족하니 이곳들을

방패삼아 공격한 것이지.

이 짤이 그 상황을 설명하기 적절할거야.

학교에서 대전차포를 쏴대니 백린탄이 날아가지.

 


 

난 절대로 팔레스타인을 동정하지않아.

진보진영의 제 발 찍는 언론플레이도 보면 역겹다.

그저 자업자득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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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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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고개요

2021년 3월 23일 동유럽 표준시로 오전 7시 40분 경, 파나마 선적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수에즈 운하 내에서 좌초되어 운하가 양방향 통제된 사고다.

 

 

2. 선박정보

 

 

 

 

3. 사고 진행

 

 



에버 기븐호는 말레이시아 탄중 펠레파스 항에서 출발하여 3월 31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로테르담으로 향하던 중 수에즈 운하의 입구에 위치한 수에즈 항구를 경유한 뒤 현지 시각으로 3월 23일 4시 17분에 수에즈 항구에서 출발하였으나, 7시 40분경 원인 불명으로 인해 수에즈 운하 남쪽 수로 중간 구간에서 좌초하였다.

해운물류기업 GAC는 "진입하던 중 갑작스러운 강풍을 맞아 수로를 이탈했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다가 좌초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이집트군이 예인선과 굴착기로 끌어보러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2021년 3월 25일에 예인해보고자 시도하였으나 썰물 때문에 작업이 길어졌다. 바닷물이 최대 수위가 되는 28~29일은 되어야 예인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네덜란드의 '스미트 샐비지(Smit Salvage)'와 일본의 '닛폰 샐비지(Nippon Salvage)'를 구난업체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미 해군도 자문단을 파견해 구조 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다.

3월 27일 이집트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의 오사마 라비 청장은 기자회견에서 전날까지 준설선을 동원해 뱃머리가 박힌 운하 제방에서 2만㎥ 가량의 모래와 흙을 퍼냈고 총 14대의 예인선을 투입해 작업 중이라고 설명했으며 총톤수 22만4천 t에 달하는 엄청난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9천 t가량의 평형수도 뺐다고 밝혔다. 또한 좌초 원인에 대해 "강한 바람이 주요 원인은 아니며 기계 또는 사람의 실수가 사고의 한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시간으로 3월 28일, 예인선단이 좌초된 에버 기븐호를 2인치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4. 여파

중형선도 아닌 초대형선인 에버 기븐호가 운하 출입구도 아닌, 수로 중간을 가로로 떡하니 막아버리는 바람에 운하가 양방향 통제되면서 지중해(북쪽 출입구), 홍해(남쪽 출입구) 양쪽에서는 발이 묶인 선박 200척 이상이 닻을 내리고 대기 중이다.


이집트 당국은 예인선이 에버 기븐호를 인양하기까지 최소 이틀은 걸린다고 내다보았고, 선박 주변의 모래 등을 퍼 올리는 데에만 며칠은 걸린다고 예상하였다. 수습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에 따라 전 세계의 원유(유조선) 및 가스(LNG선) 공급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일대 물동량이 한동안 병목현상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 운하가 통제된 지 단 이틀 만에 세계 유가가 6%나 오르고 세계 물류의 12%가 멈춰버렸다. 게다가 일부 선박에는 생동물을 실은 만큼, 할랄 푸드같이 특정한 도축이 필요한 동물은 폐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등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결과를 실제로 목도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은 수에즈 운하가 국제무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새삼 피부로 느꼈다.

사고가 장기화되면 다른 선박들은 시간적, 비용적 손해를 무릅쓰고 계속 대기하거나, 먼 옛날 대항해시대 시절이나 제3차제4차 중동전쟁 시기처럼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에버 기븐호의 선주는 수에즈 운하 앞에서 발이 묶인 배들의 선주와 수에즈 운하(이집트 정부) 측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받을 것이다. 해당 선박은 일본 MS&AD에 선체보험을, UK P&I클럽에 책임보험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에버 기븐호가 보험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액 산정조차 엄두가 안 날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 당장 운하 영업중지로 생긴 피해보상만 따져도(=다른 선박들의 운하 통행료) 척당 수억 원이 넘는 데다, 다른 선박들의 항해가 지연된 보상 등을 더하면 정말 답이 안 나온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선원들에게 있는지, 아니면 배 자체에 있는지도 큰 쟁점이다.

대만 공상시보에 따르면 이 사고로 인한 운하 이용 불가에 따른 손해액은 단순 계산으로 시간당 4억 불, 하루에 96억 불(약 10조원)에 이른다고 하며, 컨테이너선을 운항하는 대만 에버그린 해운의 장옌이 회장은 대만 교통부에 조작 오류 및 불가항력을 이유로 선박에 손해를 끼친 경우 책임은 선주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또한 24일자의 회사 공식 성명문에서도 선주 측의 대응을 요구했다. 선주는 제조사 이마바리조선의 자회사인 일본 쇼에이기선이다.

수에즈운하 당국이"사고원인은 바람이 아니며, 사람의 실수이거나 기계적 결함일 수 있다." 고 발표해서, 운영사인 에버그린해운(+대만 정부)과 선주 쇼에이기선(+일본 정부) 중 하나는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손해액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나 선박 회사들은 이미 여러 보험에 가입하고 있고, 보험사들도 재보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각 회사의 부담액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현대 글로비스에서 제조한 골든레이 호의 전복 사건에서도 1000억원이 넘는 피해액 가운데 현대해상의 부담금은 10%도 채 안되었다. 
그리고 5000억원이 넘는 피해액에서 56억원만 배상하도록 판결난 태안 기름 유출사고의 사례에서 보면 선박 회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박 배상 책임제한 제도가 있기 때문에 배상 상한액을 넘는 금액은 선주나 운영사가 부담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선박주나 운영 회사가 파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3월 26일, 기다리다 지친 해운사들이 결국 희망봉 우회를 시작했다. 화물선 뿐만 아니라 유조선(원유,LNG등등), 어선, 크루즈선들도 매한가지로 돌아가거나 강제 정박을 하는 등 본의 아니게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3월 27일, 대한민국 선사인 HMM는 영국에서 출발 예정이었던 임시 선박 HMM 프레스티지(Prestige)호를 희망봉으로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수에즈 입구에 들어선 데다 선사 동맹 디 얼라이언스 공동운항 체제에 들어있는 HMM 그단스크(Gdansk)호는 계속 대기한다고 한다.

3월 28일, HMM는 추가로 HMM 스톡홀롬호, HMM 로테르담호 등 4척의 선박에 대한 희망봉 우회를 결정했다.

 

 

*3줄요약

짱깨가

운영하면

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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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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