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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아마 제목만 들어도 알 법한 이야기이다.

 

영국의 만행과 아이슬란드의 패기 - 대구 전쟁 이야기이다.

생선 대구 맞다. 입 밑에 수염 달린 듯하게 생긴 그 물고기.

 

<대서양 대구>

 

이 물고기가 어떻게 전쟁의 주역이 되었느냐 하면, 역시 영국 때문이다.

 

19세기. 그러니까 금융경제도 관광업도 없던 시절. 소프트웨어 산업은 몇 백년 더 기다려야 하던 시절. 

자윈도 공업도 없고 심지어 농사도 잘 되지 않는 북쪽의 척박한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당연히 가난한 소국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먹여살려주는 건 차가운 바다에서도 잘 활동하는 대서양 대구뿐. 덴마크 식민지 시절 아일슬란드의 슬픈 기억.

 

문제는 아이슬란드 남쪽에 영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섬나라 이웃 아일랜드처럼 영국의 짓밟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탐욕 가시권에 든 건 사실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인구가 늘어나 값싼 튀김요리 수요가 늘어난 영국은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대구들을 잡기로 한다.

덴마크는 페로 제도에서 50해리까지 외국 어선은 들어오지 말라는 조치를 내렸으나, 영국은 영국답게 쌩깠다.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영국의 위치. 빨간 원 안이 페로 제도. 왼쪽 위가 아이슬란드 왼쪽 아래가 영국(스코틀랜드) 이다>

 

거기에 양아치 조약까지 채결하는데 아이슬란드 해안가에서 3해리까지만 덴마크/아이슬란드의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답게 그 3해리조차도 침범해 해안가의 대구까지 싹 쓸어간다.

참고로 1해리가 1852미터이다. 그러니까 영국은 해안가에서 5.5km 까지만 영해로 인정해 준 후 그것마저 어겼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가 대구에 집착하는 잉글랜드 양아치로부터 잠깐이나마 자유로웠던 기간은 두 번의 세계대전 뿐이었다.

잠깐 자유롭게 대구를 잡아 먹고 지내던 아이슬란드인들은 2차대전이 끝나자 영국의 대구 집중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서 잠깐. 왜 영국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구잡이에 열을 올렸냐고? 이거 때문이다.

 

<대구 간 기름을 줄 서서 받아먹는 영국인 아이들>

이거 먹겠다고. 식량난이 겹치고 대구 간 기름의 비타민이 좋다고 믿은 영국 정부는 아이슬란드의 대구를 삥뜯어 영국인들에게 먹이려고 했다.

4면이 바다인 섬나라인데 굳이 북쪽의 대구를 먹겠다고 난리를 치는 영국을 아이슬란드는 또 다시 막아야 했다.

 

 

1차 대구 전쟁

1945년 대륙붕 (수심 200미터 이내의 완만한 해저 지형) 의 자원은 그 나라의 것이라는 미국의 트루먼 선언에 끼어들어,

아이슬란드는 기존 영국과 체결했던 바다 조약을 3 -> 4 -> 큰맘먹고 12해리로 늘린다.

 

<아이슬란드가 넓히고자 했던 영해 지도>

 

당연히 영국은 반발해 영국 해군 함정들을 아이슬란드로 파견했다.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경비정을 보냈다.

아이슬란드의 경비정들은 영국 어선의 그물을 잘랐고 영국 어선들은 해군 함정들의 호위를 받았고 좁아서 대구를 잘 못 잡았다.

이 분쟁은 10년이 넘도록 늘어진다. 물론 이득을 본 건 아이슬란드 쪽

 

이후 출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1961년 결국 아이슬란드의 12해리를 인정해준다.

하지만 영국은 이후 분쟁이 발생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조약을 체결한다. 외교력으로 아이슬란드의 차후 확장을 막겠다는 것.

아이슬란드 야당은 반대했지만 지친 아이슬란드는 받아들인다.

 

 

 

2. 2차 대구 전쟁

 

10년 뒤 1972년. 지난 조약에 반대했던 야당이 정권을 잡자 영해를 50해리로 늘리겠다고 발표한다.

50해리는 위의 대륙붕이 이어진 곳이 50해리까지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반발했지만 아이슬란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1. 지난번 협상은 너희들의 협박이고

2. 어획량 제한 해놓고 가져가겠다는 건 못 믿겠다. 싫다.

3. 그리고 대구 없으면 굶어죽는다고

 

결국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또 다시 출동하고 아이슬란드는 영국이 계속 괴롭히면 NATO 탈퇴와 국교 단절도 불사하겠다는 카드를 꺼내든다.

 

다급해진 NATO 는 73년 10월 2일 중재에 나섰고 영국 정부는 결국 50해리를 인정하고 물러나야했다.

 

<50 해리 지도>

 

 

 

3. 3차 대구 전쟁

 

하지만 대구 전쟁은 3차까지 이어진다.

 

1973년 개발도상국 34개국이 모여서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까지 과감하게 늘리자고 했는데

아이슬란드도 여기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히 넓으면 좋다! 이런 건 아니고,

74년도부터 아이슬란드 해역의 대구 수가 급감하고 있어 비상이 걸린 참에

오일 쇼크까지 겹친 아이슬란드는 주변 바다의 대구를 모두 잡아야 국민들을 겨우 먹여살릴 수 있는 처지에 내몰린다.

 

<200해리 지도>

 

결국 200해리 넓히겠다고 하고, 영국이 어김없이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

 

이 때 아이슬란드는 갈등이 또 지속될 기미를 보이자 초강수를 둔다.

 

아이슬란드: 영국이 ㅈㄹ을 멈추지 않는다면 소련에 붙겠다.

 

나토: 아이 싯팔!

 

나토 미국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이 초강수에 비상이 걸렸다.

북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국가가 소련에 붙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미국 유럽이 물리적으로 절단나는 것은 물론이요, 만약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레이더 기지는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대서양 한폭반에 핵미사일과 잠수함 기지까지 박아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냉전의 균형추는 소련 쪽으로 급격하게 기우는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이슬란드는 200해리 퇴거 명령 불응 시 영국과 국교 단절이라는 조건도 다시 걸었지만

상황의 심각성은 모르고 대구에 미쳐버린 영국은 불응했다.

 

결국 1976년 2월 19일을 기해 아이슬란드는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하지만 국교를 단절했다고 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어서 아직도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아이슬란드 경비정 vs 영국 해군 마찰은 지속되었고

한 편 미국 의회와 유럽 의회 (당시 EU 가 아니라 EC) 는 200해리를 인정해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까지 오자 영국 내부에서는 고작 대구 좀 먹겠다고 아주 ㅅㅂ 막 나가냐는 목소리가 나왔고

미국과 유럽도 니들의 맛 대가리 없는 피시 앤 칩스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이 통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1976년 6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아이슬란드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다.

(200해리 내에서 최대 24척이 5만톤 이하로 대구 잡기. 하지만 24척 가지고는 3만톤도 못 잡았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끝난다.

 

 

하지만 영국과 기타 유럽국가 + 미국은 아이슬란드가 막을 수 없는 방법으로 기어코 아이슬란드에게 엿을 먹였다.

 

<지구 온난화와 바다 수온 상승>

대구는 차가운 바다 물고기이다.

 

 

 

 

 

*번외

 

야 니들도 우리처럼 볼락 먹고 대구는 좀 줄여봐

 

ㅈ까

 

ㅂㅅ

 

 

*(독일은 볼락을 더 좋아해 아이슬란드와 일찍히 평화롭게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영국에게 볼락을 더 먹지 그러냐는 설득을 공식적으로 해봤지만 까였다.)

 

 

그리고 영국이 그렇게 목숨 걸었던 대구로 만든 그들의 요리

 

 

대.단.하.다. 논.영!

개드립 - 영국의 만행, 아이슬란드의 패기 ( https://www.dogdrip.net/287103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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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20. 10. 26. 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