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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일본의 산업화, 근대화 과정은 구미의 열강들의 산업화 과정과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하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산업화,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제압함으로써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어떻게 일본은 단시간내에 산업화,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크게 네 가지 요인, 시대적, 지정학적, 사회적, 정책적 요인으로 구분해 살펴보자.





1. 시대적 요인




1839년 영국과 청나라간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아시아 전반의 국가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일본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힘과 문명의 질서가 중국 대륙에서 구미 대륙으로 전환되는 광경을 본

일본은 자신들도 언제 다른 열강들에 의해 침략을 받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의 근대화의 도화선에 불씨를 지핀 사건이 터졌다.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 함대가 일본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였고

페리 제독은 군사적 우위를 앞세워 일본 정부의 개항을 요구한다.

 일본은 이 사건으로부터 일본과 구미 열강과의 기술적 차이를 깨달았고 일본도

이에 발 맞추지 않으면 독립국가는 커녕 열강의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함을 직감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당시 봉건제도 성격의 후진적인 막번 체제를 뒤집고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국가의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로써 탈바꿈한다.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구미 열강의 후발주자로써 산업화에 착수하게 된다.

비록 일본은 열강과 대략 반세기 이상 격차가 나는 산업화 후발주자였지만 19세기 중엽의 시기는 

산업화의 첫 발을 내딛기에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유럽 국가의 경우 기술적 발전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이전의 것들은 폐기되어야 했지만

일본은 그 당시 어느정도 체계가 잡히고 정리된 기술을 받아들여 곧바로 적용시킬 수 있었다.

예로, 가스등에서 전기등으로 전환, 증기 에너지에서 전기 에너지로의 동력의 전환은

이미 많은 돈을 들인 기존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대체하는데 큰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일본은 이러한 시간과 비용을 치루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2. 지정학적 요인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는 또한 지정학적 요인도 매우 컸다.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동북아시아 말단의, 그것도 섬나라라는 독특한 지정학적 환경은

외세의 침략을 배제시킴으로써 오로지 일본은 근대화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섬나라인데다 거리상으로도 엄청나게 먼 일본을

굳이 큰 희생을 치루어 점령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 유럽 열강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건설에 바빴고

미국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라 일본을 상대할만한 여력도 없었다.

한국 또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경제발전에 올인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3. 사회적 요인




에도시대 일본은 근 200년간 전쟁이 없어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군의 대량의 인원이 군사활동에서 행정활동으로 옮겨가게 되었음은 물론

농업기술의 발달과 일본 전국 각지에서 토지개간 활동이 일어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충분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1731년 에도(현재 도쿄)에는

인구가 100만에 육박했는데 당시 전세계에서 인구가 100만이었던 도시는 에도 뿐이었다.

게다가 거리 곳곳에는 서점이 즐비했는데 이는 일본의 출판 시장이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책을 통해 빠른 정보 습득이 가능했고 일본인 대부분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기존 출판시장의 흥행 덕분에 서구의 기술 문명은 일본 사회 전체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책이란 것은 매우 귀했고 서점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지식은 양반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다.





4. 정책적 요인




우리나라 또한 박정희 정부의 정책적 주도하에 단시간에 근대화를 이루어 낸 것과 같이 일본 또한 그러했다.

페리 제독의 무력 시위를 통한 강제 개항의 수모를 겪은 일본은 이후 유럽과 미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뛰어난 인재를 보내어 그 기술을 배우게 했다. 메이지 유신이후 본격적으로 정부 주도하에 

근대화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 시기 일본 제국대학이 탄생하게 된다.

이미 출판시장이 활성화되었기에 시민들의 문명개화 작업은 매우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진입하자 서양의 문명에 쫒아가기만 하던 일본은 점차 독자적인 기술을 만들어 낼 정도가 되었다.

에도시대부터 이미 충분한 재정이 확보되었기에 일본 정부는 사회 전반의 기반시설을 만들었고

정부가 소유한 공기업을 어느정도 키운 다음 민간에게 넘겨주는 형식으로 민간기업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민간기업 중 하나가 바로 일본 내 최고의 기업인 미쓰비시 그룹의 시작이다.

일본은 당시 서양에 비해 자신들은 열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을 개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열등감은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개화대상으로 보게끔 하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중국과 조선은 개화될 조짐이 없었기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근대화 동맹을 맺을 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했고

 일본 또한 열강들에 맞서기 위해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로 팽창주의를 택했다.

이 때문에 정부와 기업은 군비를 늘려 군사력을 확장시키는데 집중하고 후일 러일전쟁에 승리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과 같은 열강의 반열에 자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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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장 에르 :) 2019. 10. 2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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